오랜 기간 공들여 제작한 스피커 명가의 솜씨 스피커를 평하다 보면 처음에는 무슨 유닛을 사용했는가, 구성은 어떻게 되는가, 어느 나라 제품이고 누가 설계했는가 등을 따지게 된다. 또 대략 이런 정보를 축적하다 보면, 디자인이나 외관만 갖고도 어느 정도 소리를 짐작하게 된다. 물론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대충 이러이러한 음이 나겠구나 상상할 수 있다. 더구나 평론을 하면서 무수한 스피커를 거치고 나자, 약간은 건방지게 되어, 그냥 첫 눈에 보고도 판별하는 나쁜 버릇이 들어버렸는데, 이점은 늘 음을 듣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반성하곤 한다. 아마 패러다임이라는 스피커 메이커를 친숙하게 받아들일 애호가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약간 알려지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국내에 마케팅을 하지 않아 그냥 흘려들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번에 본격파 톨보이 모델인 스튜디오 60 v.5를 소개하면서 적극적인 홍보에 들어갈 예정이니, 앞으로 이 제품을 통해 패러다임이라는 회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는 예전에 패러다임의 소형 북셀프 스피커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사실 이 제품은 사진으로만 보면 그다지 포스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실물을 앞에 두고 봐도 정교하고, 세심하게 만든 느낌은 나오지만, 특별한 포스를 느낄 수 없었다. 더구나 북셀프였으니, 애초부터 시산을 끌 리가 없다. 당연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본격 시청을 위해 클래식을 걸었더니 꽤 음이 신선하고 좋았다. 재즈도 마찬가지. 아, 북미에서 꽤 잘나가는 메이커라고 하는데, 이런 기본기가 있구나 하면서 조금씩 느낌이 왔다. 이 와중에 60년대 말의 사이키델릭 시절 록 음악을 튼 게 화근이었다. 정말로 처음 들어보는, 열기와 마성이 넘치는 음이 나왔던 것이다. 재니스 조플린이나 지미 헨드릭스 등이 잔뜩 약에 취해 자신의 몸에 남은 마지막 에너지까지 쥐어짜서 내놓은 음이 절실하게 다가와, 한참 이런 음악에 몰두했던 대학 시절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아것은 많은 스피커를 리뷰하면서 겪은 중에 상당히 이색적인 체험이며, 당시 리뷰에도 이 점을 분명히 강조했다. 불행히도 이 제품을 손에 넣을 수는 없었지만, 이 회사의 내공만큼은 뇌리에 깊이 각인하게 되었다. 이번에 새로운 제품을 만나는 만큼, 여간 흥분되는 것이 아니다. 이 회사는 현재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미시사가라는 도시에 베이스를 두고 있다. 창업한 지 올해로 25주년이 되는데, 아무래도 JBL이나 탄노이 같은 전통 명가에 비하면 일천하지만, 빠른 시간 내에 시장을 석권한 스피커 메이커 중 하나다. 아마 이 정도의 급성장이라면 다인오디오나 B&W 정도와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현재 7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으니, 그 인지도와 영향력은 상당하다 하겠다. 또 매년 전 세계 딜러들이 모여서 추천하는 가격대비 성능에서 최고의 제품상을 수없이 수상한 것도, 동사가 갖는 최대 이점이라 하겠다. 리뷰 제품은 스튜디오 60을 기본으로 해서 버전 5까지 진화한 제품으로, 하나의 컨셉트를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개량하고 또 수정 보완한 예는 별로 없을 것이다. 전작보다 한층 완성도가 높아진 것으로 기대해도 좋을 듯싶다. 사실 하루가 멀다하고 신제품이 쏟아지는 요즘, 이렇게 하나의 모델을 계속 붙들고 앉아서 고쳐나간다는 것은 어지간한 뚝심이 없이는 불가능한데, 그런 면에서 윌슨 오디오와 같은 회사가 연상되기도 한다. 아무래도 시장에서 평이 좋으니, 계속 이런 식으로 개량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가격에 관해 하나 언급할 것은 패러다임이 기본적으로 드라이버를 자체 설계 및 제작한다는 데에 있다. 원가 절감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만, 무엇보다 원하는 스펙으로 개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본 기에 쓰인 유닛들은 이런 개선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당초 전체 스튜디오 시리즈 버전 5를 기획할 때의 모토는 이런 것이었다. ‘이전과 같은 훌륭한 음향에 더욱 높아진 파워 핸들링 능력’ 다시 말해, 더 강력한 파워가 들어와도 아무런 하자 없이 동작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이럴 경우, 대음량 재생시에 매우 유리해진다. 하지만 이를 위해 연구해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유닛에서도 중앙에 위치한 페이즈 플러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음량 시에는 유닛의 움직임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큰 진폭으로 움직일 때엔 부분적으로 위상이 바뀌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일단 페이즈 플러그의 개선부터 시작한 것이다. 또 진동판이나 보이스 코일 등에서도 많은 아이디어가 투입되어 저왜곡을 실현하면서도 내구력이 강한 드라이버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렇게 바탕이 튼실해야 원하는 형태의 스피커를 제작할 수 있지 않은가? 여기서 언급할 것은 이런 기술이 동사의 최고급 모델인 레퍼런스 시그너쳐 시리즈에서 이양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억시 고가의 플래그십 모델을 만드는 회사만이 갖는 장점이 아닐까 싶다.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서 만들어낸 기술로 최고급 제품을 만든 후, 하나씩 원가를 절감해서 결국은 대중적인 제품에도 채용한다는 발상. 본 기에는 이런 숨은 하이 레벨의 기술이 투입된 것이다. 한편 인클로저를 보면, 이전과는 달리 약간 작아졌다. 유닛의 성능을 발전시키고, 인클로저의 강성을 추구한 결과다. 덕분에 인클로저 상하 및 전면은 상당히 두터운 MDF로 제작했으며 내부 보강재도 단단하게 덧붙였다. 첨단 댐핑 소재를 칠한 것도 특필할 만한 사항으로, 이른바 퍼머코트 리어쿠스틱(Permacote Linacoustic)이 그것이다.
마감으로 말하면, 무려 7겹의 래커 칠이 행해졌는데, 한 겹을 바르면 완전히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새로 바르는 식4으로 이뤄졌다. 물론 숙련된 장인의 손길로 말이다. 그 위해 더해진 다양한 플레이트는 음향학적 고려뿐 아니라 시각적인 세련미도 아울러 갖춘 바, 개방감을 갖춘 그릴과 더불어 수려하고, 세련된 외양을 자랑한다. 한 마디로 전작의 장점을 계승하되, 여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개량을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숱한 찬사를 얻어낸 버전 4의 업적을 계승할 만한 수준이라 여겨지며, 이를 통해 한 차례 커다란 반향을 이끌어낼 기세다. 본 기의 시청을 위해 필자가 자주 사용하는 오디오 아날로그의 베르디 & 로시니 콤비가 등장했다. 첫 곡은 힐러리 한이 연주하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역시 큰 스케일의 오케스트라가 나온다. 중간 중간에 터져 나오는 관악기의 움직임도 일목요연하게 잡힌다. 여기에 바이올린의 음은, 기세 좋게 위로 쭉 뻗고, 심지가 굵으며, 꿈들꿈틀 살아서 움직인다. 뱃심을 갖고 강하게 보잉하는 느낌이다. 오케스트라와 바ㄹ이옹린 주자의 간격도 적절해서, 눈을 감으면 이들이 서로 화합하고 또 경쟁하는 모습이 정확하게 포착된다. 그레이트 재즈 트리오의 “S Wonderful”은, 초반부에 강력한 드러밍으로 전개되는데, 거의 제 사이즈의 드럼이 나온다. 박력, 펀치력, 파워, 리듬감 등 뭐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현란하게 연속해서 킥드럼을 밟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더블 베이스의 핑거링도 상당히 부산하고 바쁜데, 역시 놓치지 않는다. 한편 중앙에 위치한 피아노는 노련미 그 자체. 유려하게 악단을 이끈다. 무엇보다 누구 한 명이 솔로 연주를 하면, 다른 주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뚜렷이 포착되어 탄복하고 말았다. 매들린 페이루의 ‘Instead’는 신명난 리듬을 타고 시작되어, 자연스럽게 발장단이 나온다. 두툼하고 거친 톤의 슬라이드 기타라던가 어쿠스틱 기타의 명료한 울림이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쭉 뻗어 나오고, 심지어 손가락 움직임까지 잡힌다. 이런 섬세함은 보컬에서 특히 장기가 되어, 그녀 특유의 애수 띤 노스탤지어한 보컬이 유유히 흘러나온다. 스피드에서도 부족함이 없어, 여러모로 공들여서 잘 만든 스피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산물이라 하겠다. [월간오디오 2009년 5월호 글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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